읍내마을
계진리/상리/상옥리/신대리/아인리/양지리/음지리/중도리/하옥리
소개
면적 21.55㎢, 인구 2만 5281명(2001)이 거주하는 금산읍은 9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벼농사와 인삼재배가 활발한 금산읍은 많은 농지가 고장의 특산물인 인삼 재배지로 이용되고, 또 산지는 여름에도 서늘하여 1모작이 많기 때문에 식량의 자급이 매우 어렵다. 인삼재배지는 인삼재배 후에 사과 과수원으로 전용되기 때문에 인삼과 더불어 사과생산도 많다. 이곳은 또 군내 각지 및 인접한 각 군을 연결하는 도로교통의 중심지로, 정기시장이 열려 인삼을 비롯한 농산물의 집산이 활발하다. 문화재로는 금산향교(충남기념물 121), 탑선리 석탑(충남문화재자료 326), 아인리 석탑(충남문화재자료 327), 금산 대원정사(충남문화재자료 337), 금계관(錦溪館), 홍범식 순절비, 계진리 석탑 등이 있다.
문화유적
탑선리석탑(충남문화재자료 제326호 · 금산읍 중도리)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이 220㎝인 탑선리석탑. 탑이 있던 것으로 보아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고증할 방법이 없다.
보은향교(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95호 . 보은읍 교사리 283)
이 향교는 원래 세종(1418∼1450, 재위)때에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처음 지은 것이나, 지금의 건물들은 18세기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이곳의 명륜당은 고종 8년(1871)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게 된 상현서원의 강당을 옮겨다 지은 19세기 말엽의 건물이다.
아인리 석탑(충남문화재자료 327 · 금산읍 아인리)
금산읍 아인리 금산여고와 산업고 중간 지점에 있는 고려시대의 3층석탑으로 탑선리탑과 함께 이 고장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다. 탑의 높이는 약 2m에 달한다. 충청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327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금산향교(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121호 · 금산읍 상리)
금산향교는 옛날에는 지금의 금산읍 하옥리 백학동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에 불타 없어져 숙종 10년인 1684년 현위치인 금산읍 상리 4번지 비호산밑에 새로 지은 것이다. 문묘에 배향한 성현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5성과 우리나라 신라이후 성현 18위를 모셨었는데 8.15해방이후 이 고장 유림의 공론에 의하여 중국의 유현을 모심은 사대주의 사상을 이어받음이니 중국유현의 위패는 철가하자는 결의에 따라 이를 철거하고 5성과 우리나라 18현만을 모시고 있다. 문묘의 석전제는 매년 8월 초정일에 제전을 드리고 있다.
가볼만한 곳
진악산(進樂山 737m · 금산읍 남이면)
진악산은 해발 737m의 높이로 충남에서 4번째 높은산으로 주릉에 펼쳐지는 기암괴봉의 경관이 아름다우며 금산쪽으로 깍아지른 높은 낭떠러지는 장엄하기까지 하다. 진악산을 감싸고 있는 숲도 무성하며 영천암과 원효암 골짜기의 개울도 좋다. 특히 진악산 북편 관음봉 일대의 암애와 암봉들, 원효암 일대의 기암괴봉과 폭포는 일품이다. 명물명소로는 보석사 입구에 전나무 숲과 천연기념물 365호인 1,1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있고, 천년사찰 보석사와 영천암, 원효암이 있으며, 영천암 영천약수, 도구통바위, 봉화대, 관음암과 관음굴, 원효폭포, 물골의 바위굴은 명소로써 훌륭한 가치를 지닌다. 진악산 정상에서는 속리산과 서대산, 천태산, 민주지산, 덕유산의 장쾌한 산줄기를 모두 볼 수 있으며, 운장산의 특이한 모습도 보이고 계룡산도 눈에 뛴다.
* 교통편
- 경부고속국도
: 대전비룡분기점 - 대전남부순환도로 - 대진고속국도 - 추부IC - 금산IC
- 호남고속국도
: 서대전분기점 - 대전남부순환국도 - 대진고속국도 - 추부IC - 금산IC
* 현지교통 : 금산읍에서 남이면 석동방면 시내버스(1일5회, 20분 소요)
면내마을
구억리/금성리/길곡리/대산리/동곡리/명곡리/명암리/수당리/신안리/용화리/저곡리/제원리/천내리
소개
면적 64.30㎢, 인구 4,007명(2001)이 거주하는 제원면은 13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금강과 봉황천 유역에 있기 때문에 농경지가 다른 면에 비해 비교적 넓은 편이어서 쌀·보리·고추·참깨·황기 등의 생산이 많다. 문화재로는 신안사 대광전(身安寺 大光殿:충남유형문화재 3), 천내리 용호석(川內里 龍虎石:충남유형문화재 4), 용강서원(龍江書院:충남유형문화재 19), 신안사 극락전(충남유형문화재 117), 구억리 고인돌, 권종 순절 유허비 등이 있다.
문화유적
용호석(제원면 천내리)
용호석은 2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원면 천내리 마을 서쪽을 흐르는 강변에 있으며 제원대교에서 북쪽으로 500m 지점에는 용석(龍石), 그로부터 다시 북방으로 100m 떨어져 호석(虎石)이 위치하고 있다. 용석은 70*80cm 가량되는 대석(臺石)위에 조각되었으며 높이 138cm 전후 폭 81cm인데 이름을 상징한 듯한 여러개의 과형돌기와 그 사이에 꿈틀거리는 용의 몸체가 조각되어 있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 양편에는 아가미와 수염이 표현되어 있다.
용강서원(제원면 용화리)
금강상류의 맑은 물을 내려다보며 자리잡고 있는 용강서원은 주위의 산천이 아름다운 경승지로, 이 서원에는 노론파의 영도자인 우암 송시열과 동춘 송준길, 미호 김원행, 시남 유계, 역천 송명홈의 5위 유현의 위패를 배향하고 강학과 예론에 정진하였으며 노론파의 근거지로 초려선원과 손을 잡고 소론파의 산천재서원과 대립하여 논쟁이 끊일 사이가 없어 조선말 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당시 지방유림의 정성으로 헐린 재목의 일부를 모아서 용강서원을 짓고 이 지방 자제들의 유교교육과 한학연구에 노력하였다.충청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가볼만한 곳
천내강과 봉황대
금산에서 동쪽으로 7km 지점에 산과 강, 옛 문화재와 임진왜란의 전적지가 금강을 사이에 두고 펼쳐지고 있다. 이곳이 금산의 명승지이며 사계절 연중 관광객이 찾아드는 천연의 모습을 간직한 곳이다. 천내강은 제원면 저곡리와 개티 건너편의 천내강 사이에 있는 금강상류로 담수어가 많이 잡히며, 천내리 강가에는 고려시대 유물인 용호석(龍虎石)이 280m 간격으로 서 있고 강가에는 임진왜란 당시 금산군수로 적을 막다 순국한 권종의 전적비가 서있어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저곡리 갯벌 옆산은 그 이름이 봉황대 (鳳凰臺)로 강을 향해 높이 솟아있어 옛부터 시인 묵객의 좋은 놀이터가 되었다. 이 산마루에는 봉황대라는 정사가 있어 찾는 사람의 좋은 휴식처가 되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고 저곡리 뒷산에는 임진왜란때 쌓은 성터가 지금도 남아있다.
신안사(677m · 제원면 신안리 52)
제원면 신안리 동북쪽에 있는 해발 677m의 신음산. 국사봉에서 내려온 지맥의 산록에 있는 신안사(身安寺)는 신라 26대 진평왕 5년인 무염선사가 창건한 고찰.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주위환경이 산자수명하고 정적한 유수경으로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고 하여 신안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이 절에는 대광전, 진향각, 극락전, 요묵당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대광전(유형문화재 제4호)과 극락전(제177호)만이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국사봉과 천태산(제원면 신안리, 군북면 두두리)
금산군과 충북 옥천군 사이에 솟아있는 명산으로 장엄한 산세와 울창한 숲으로 이름이 높다. 제원면 소재지에서 2km쯤 가서부터 장장 8km가 넘는 깊은 계곡에서 맑고 깨끗한 시냇물과 기암괴석이 어울리고 갖가지 꽃과 풀이 우거져 해인사 입구를 연상케 한다. 골짜기에 있는 길안(吉安), 장선(長仙) 등의 산촌은 속세를 떠난 듯 그 이름부터가 시적이다. 깨끗한 개울을 세줄기 거느린채 소박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국사봉은 산초나무가 유난히 많아 등산객들에게 또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금강줄기를 내러다보는 천태산은 기암괴봉과 바위 등 경관이 아름답고 우뚝하여 전국에서 많은 등산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 현지교통 : 금산에서 제원방면 신안사행 시내버스 운행 (14:00 19:40, 1일 2회, 1시간 20분 소요)
면내마을
관천리/방우리/불이리/선원리/수통리/신촌리/양곡리/어재리/예미리/창평리/평촌리/현내리
소개
면적 66.44㎢, 인구 4,318명(2001)이 거주하는 부리면은 12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으로 충북 영동군과 전북 무주군, 남쪽으로 노고치(老古峙)·수로봉(水路峰:506m)·지삼치(芝三峙)·베틀봉에 의하여 전북 무주읍, 서쪽으로 덕기봉(德基峰:556m) 줄기에 의하여 남일면(南一面), 북쪽으로 금강·봉황천(鳳凰川) 및 구릉에 의하여 제원면에 접한다. 성주산(聖主山:624m) 서쪽 금강 상류에 위치하기 때문에 금강 상류 연안에 약간의 논이 있다. 주요 농산물로 쌀, 특용작물로 감·누에고치·약용작물·인삼 등이 산출된다. 문화재로는 청풍사(淸風祠:충남문화재자료 16), 덕산사(德山祠:충남문화재자료 281), 귀암사(龜岩祠:충남문화재자료 301), 금산 평촌리 성지(坪村里城址),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등이 있고, 금산 물페기농요(충남무형문화재 16호)가 전하고 있다.
문화유적
청풍사(충청남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16호 · 부리면 불이리)
부리면 불이리에 위치한 사당으로 고려말 충절공 야은 길재의 불사이군의 높은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진영과 위패를 모시고 지방 유림에서 해마다 춘추로 제향을 모시는 사우이다. 청풍사에는 서원을 개설하고 충절공의 높은 충절과 도덕을 이어받을 인물을 양성하였으며 본래 이 동네의 이름이 부리이던 것을 불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청풍사의 앞에는 야은선생 불이유허비와 백세청풍비가 화려한 비각안에 충절공의 충절과 행장을 자세히 전해 주어 찾는 이의 옷깃을 여미게 하여 지주중류비가 공의 충절을 전해주고 있다.
덕산사(충청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281호 · 부리면 불이리)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 부락에 있는 밀양박씨의 문중사당으로 눌재 박중영, 강수 박훈, 퇴우당 박사현 세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 1966년 가을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덕산사의 액자를 내렸다.
귀암사(충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301호 · 부리면 평촌리)
부리면 평촌리 귀래봉 밑에 문양공 눌재 양성지를 모신 사당과 그 묘비가 함께 위치하고 있다. 문양공은 조선 초기의 학자요 문신으로, 세종조에서 성종조까지 40여년간에 걸쳐 집현전 학자, 이조판서, 대제학 등의 중임을 맡아 빛나는 치적과 많은 저서와 문집을 남겨 성종때 좌리공신으로 남원군에 봉해졌다. 귀암사는 문양공이 개설한 사숙터에 지방 유림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국가 사회에 이바지한 훌륭한 공훈과 높은 학문을 숭모하여 1922년 가을에 해마다 춘추로 제향을 모시고 있다. 묘정에는 문양공의 일생의 행장과 공훈을 기록한 눌재양선생묘비가 같은 해에 세워져 공의 훌륭한 인격과 학문과 치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그 앞에는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지금도 이 사당을 지키고 있다.
물페기농요(무형문화재 제16호 · 부리면 평촌마을)
부리면 평촌리 물페기농요는 두레농사를 지으며 부르는 일련의 일노래로 1991년 10월 전남 여수에서 개최된 제32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충남을 대표하여 참가, 종합우수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으며 1992년 8월17일 충남무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받아 보존회를 구성 계승 발전시키고 있으며 물페기농요 전승보존회에서는 1993년 7월 21일 평촌리 금강 고수부지에서 제1회 물페기농요 축제시연을 계기로하여 매년8월 (음력 7월15일 백중날 전후)로 평촌리 금강놀이 마당에서 물페기 농요, 농바우끄시기놀이,금산농악 등 각종 민속 종목을 다채롭게 구성하여 3일간에 걸쳐 금강변 여름피서객들과 한데 어우러지는 여름축제로 금강민속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물페기 농요의 특징은 금남정맥을 끼고 금강 상류지역에 위치하여 평야지대의 소리와 산악지대의 소리가 결합하여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처연하면서도 힘차고 담백한 음색을 자아내고 있다. 모내기 소리인 모노래는 경상도를 본고장으로 하고 있는 메나리조이며 논을 멜때 부르는 "얼카산이야"소리와 "방아소리"의 뒷소리는 입타령으로 이루어진 3장 구조로 물페기농요의 백미를 이룬다.
가볼만한 곳
적벽강(금산군 부리면 수통리)
금강은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뜬봉에서 발원하여 유유히 북쪽으로 흐르다가 창남에 들어서서 동남쪽에 물굽이를 틀어 서쪽 금산군 부리면 방우리에 들어선다. 여기서 부터 층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사이를 뚫고 금강이 흘러 수통리에 이르면 그 앞의 넓은 시야로 좌측으로 기암을 이루는 절벽이 있으니, 이 산을 적벽이라 부르고 그 아래에 흐르는 금강을 적벽강이라 한다. 적벽은 바위산이 붉은 색이란 데서 유래된 것으로 30m가 넘는 장엄한 절벽에는 강물아래로 굴이 뚫려 있으며 이산에는 또한 기화요처가 자리잡고 있어서 더욱 신기한 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을에는 불붙는 듯한 단풍이 강물에 투영되어 절경을 이루며 창파에 노을이 질 무렵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적벽절경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보는 것도 일품이다. 적벽아래 흐르는 금강은 마치 호수와 같이 잔잔히 흐르며 모래사장이 길게 깔려 있어 더욱 운치를 돋군다. 여름철에는 적벽강 모래사장에서 많은 피서객의 피서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 현지교통: 금산읍에서 무주방면으로 10km지나 부리면 소재지에서 평촌리방향(좌회전)으로 진행하면 부리면 수통리 적벽강 도착(40분 소요)
귀래정(부리면 평촌리~신촌리)
금강 상류의 맑고 푸른 물이 부리면 평촌리와 신촌리 사이에서 여울을 이루고 그 밑으로 내려가 산밑을 감돌면서 잔잔한 호수를 이룬다. 강 건너 신촌리 쪽에는 마을밖에 3ha나 되는 넓은 송림에 50년생 이상의 노송이 사시사철 울창한 숲을 이루어 별천지를 형성하였으나 이젠 농경지 조성으로 벌채하여 송림은 흔적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유명한 송림지 밖에는 새알같은 돌들이 곱게 깔려있고 금모래밭이 널려 있어 여름철 해수?일광욕 장소로 가족과 함께 찾기에 적당한 곳이다. 강물은 산밑을 감돌며 넓고 깊은 호수를 이루어 뱃놀이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지난날에는 충남,전북,충북의 3도지사가 호화로운 뱃놀이를 했다는 것이며 인근 주민들이 그 시중을 드느라고 몇일간 총 동원 되었다고 한다. 이 강물에 빠져 있는 듯 내려앉은 ‘동그란 산’에는 지난날에 귀래정(歸來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놀이를 찾아드는 풍류객으로 붐볕으며 이 마을 사람들은 너무나 손님을 많이 치러 이 정자를 불태웠다는 전설이 남아 있을뿐 지금은 그 빈터만 남아있다.
* 현지교통: 금산읍에서 무주방면으로 10km지나 부리면 소재지에서 평촌리방향 (좌회전)으로 진행하면 부리면 평촌리 도착(30분 소요)
면내마을
덕천리/마장리/상동리/신동리/신정리/신천리/음대리/초현리/황풍리
소개
면적 47.14㎢, 인구 3,488명(2001)이 거주하는 남일면은 9개 리로 이루어졌다. 동쪽으로 덕기봉(德基峰:556m)·두어기재에 의하여 부리면과 전라북도 무주군, 남쪽으로 봉화산(烽火山)·솔재·갈미봉(渴味峰)·목사리재로서 전라북도 진안군과 무주군, 서쪽으로 해발고도 200m 내외의 구릉과 하천에 의하여 남이면(南二面), 북쪽으로 봉황천(鳳凰川) 변과 구릉에 의하여 금산읍에 접한다. 주요 농산물은 인삼·목화·배 등이며, 면내에 인삼제품 가공공장이 있다. 면의 중앙을 지방도가 남북으로 통과하여 금산읍과 진안에 연결된다.
문화유적
충혼탑(금산군 남일면 음대리)
남일면 음대리에 위치하고 있는 충혼탑은 6.25동란때 공산군의 침입으로 희생된 남일면 출신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1956년 9월28일 건립되었다. 여기에 기록된 전사자는 군인 22명, 군속 2명, 경찰 13명으로 총 37명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기관장 및 유지들이 추모행사를 가진다.
황풍리탑(금산군 남일면 황풍리)
남일면 황풍리 마을앞 나무아래에 여자탑과 길 건너편에는 남자탑을 볼 수 있다. 탑 위에는 모든 두꺼비 형상의 윗돌이 놓여 있다. 매년 정월 초사흩날이면 탑제를 지냈는데 이날 아침 제관은 금줄을 꼬아 탑과 나무에 두르고 주위에 향토를 깔아 날이 어두워지면 징을 쳐 마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두꺼비 바위(금산군 남일면 마장리 호미동)
호미동 또는 비모골이라고 부르는 마을에 두꺼비바위가 있다. 바위의 모양이 꼭 두꺼비를 닯았다 해서 두꺼비바위 라고 부르는데, 이 바위가 바로 정성을 드려 판서에 오른 박이방(朴吏房)이 희망을 풀어 주는 바위라고 지목한 곳이라고 전해진다.
신동저수지(금산군 남일면 신동리)
1961년에 축조된 신동저수지는 670ha이며, 저수지 길이 139m, 최고 시심 16m로 677,000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 이 물로 남일면 신동리, 신정리, 음대리, 덕천리가 농사를 짓고 있다. 이 저수지는 오염이 거의 안되었고, 상류에 나무를 많이 가꿔 가뭄을 잘 타지 않는다고 한다.
가볼만한 곳
홍도마을(남일면 신정2리)
금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마을로 주변 환경이 깨끗하고 물과 공기가 맑아 충정남도에서 지정한 청정시범마을이다.
면내마을
건천리/구석리/대양리/매곡리/상금리/석동리/성곡리/역평리/하금리/흑암리
소개
면적 98.19㎢, 인구 2,690명(2001)이 거주하는 남이면은 10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으로 200m 내외의 구릉에 의해 남일면(南一面), 서쪽으로 셋티재·선치봉(仙治峰)으로 전라북도 완주군, 남쪽으로 선봉(仙峰)·성치산(城峙山)에 의해 전라북도 진안군, 북쪽으로 보티재·수리넘어재·진락산(進樂山)으로 진산면(珍山面)과 금산읍에 접한다. 봉황천(鳳凰川) 변에 약간의 경지가 분포하는데, 주요 농산물은 인삼·누에고치 정도이고 다른 농사는 별로 짓지 않는다. 면의 동부를 지방도가 남북으로 통하여 금산읍과 주천(朱川)에 연결되며, 북서쪽으로 진산면과 연결된다. 면내에 보석사(寶石寺)·십이폭포 등 관광지가 있다. 문화재로는 금산 보석사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65), 보석사 대웅전(寶石寺大雄殿:충남유형문화재 143), 금산 백령성(錦山栢嶺城:충남기념물 83),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충남문화재자료 23), 의선각(毅禪閣:충남문화재자료 29) 등이 있다.
문화유적
보석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65호·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709)
면적은 1,122㎡이고 수량은 1그루이며 수령이 1,000년 이상으로 알려져 있는 노거수이다. 나무높이 40m, 가슴높이 줄기둘레 10.4m, 가지퍼짐은 동서쪽 28m, 남북쪽 29m이다. 보석사로 들어오는 길을 지나 왼쪽 산기슭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오래된 은행나무는 대개 주축(主軸)을 상실하는데 이 나무는 주축이 뚜렷이 살아 있다. 줄기가 굵고 세로 방향으로 골이 졌으며, 뿌리목 부근에서 수많은 움싹이 돋아나 그 높이가 2∼3m에 이른다. 마을을 지켜주는 신목(神木)으로 마을에 재난이 닥치면 미리 알려준다는 전설이 있다. 보석사라는 절 이름은 앞산에서 금을 캐어 불상을 주조한데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금산 백령성 (충남도지정 기념물 제83호)
인삼의 고장 금산군에서도 남이면은 개발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곳곳에 남아있는 무공해 고장이다. 후삼국시대 때 견훤은 남이면 대양리에 경양현을 설치하고 금산의 서남방면을 방어하기 위해 백령성을 수축하였다. 백령성에서 능선을 타고 1km쯤 올라가면 산봉우리에 봉화대가 있어 진악산(732.3m)의 관양불봉 봉수대와 서로 교신했었다.
가볼만한 곳
개삼터 관광농원(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700-6)
인삼의 재배가 처음으로 시작된 곳임을 뜻하는 개삼터(開參攄)는 1500년 내력의 전설이 전해오고, 1981년도에 표석을 세워 진악산의 산신령을 모신 개삼각을 건립했다. 마을입구에 개삼터관광농원이 있는데, 2~3백년 수령을 자랑하는 거대한 느타나무 그늘 아래로 맑은 냇물이 사계절 흘러내려 경관이 수려하다. 농원 안에는 은행, 포도, 대추 모과나무 등 각종 유실수와 수석 등으로 가꿔진 정원이 볼만 하다.
* 교통 : 시내버스-금산읍-남이면 방향(1시간간격 운행)-성곡 하차(10분 소요)
12폭포(금산군 남이면 구석리)
남이면 구석리에서 동남쪽으로 2km 시냇물따라 골짜기로 들어가면 무성한 숲과 층암절벽 사이를 누비며 내려 쏟아지는 크고 작은 12개의 폭포가 있다. 이 곳이 유명한 12폭포로 그 이름도 폭포의 수를 따라 지은 것이다. 한발 한발 내디딜때마다 잎사귀에 숨어 있던 노랑나비가 어지러이 날아 오른다.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산길, 아련히 들리는 물소리를 쫓아 나뭇잎을 헤치며 10여분을 걸으면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맺히기 시작할 무렵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눈앞에 우뚝 서 있는 폭포가 나타난다. 가장 큰 폭포는 높이가 20m나 되며 물이 맑아서 은하수가 거꾸로 쏟아지는 듯한 웅장한 모습과 산골짜기에 울려퍼지는 웅장한 물소리와 옥이 부서지는 물방울은 대자연의 절경이며 조물주의 위대한 창조품이라 가히 말할 수 있다. 이곳은 옛부터 많은 관광객이 드나 들었으며 바위마다 새겨진 글귀등은 자연풍경과 어울려 그 품위를 더해주고 봄철의 화전놀이, 여름철의 피서, 가을철의 단풍놀이로 찾아드는 이들이 끊일사이 없으며 여러가지 전설이 어우러져 자연의 신비스로운 분위기를 느낄수 있게 한다, 주위의 지형과 산세로 보아 옛절이 있음직 한데 애석하게도 확인할 바 없고, 다만 남쪽 산밑에 큰 주춧돌이 흩어져 있으나 고증할 길이 없다.
* 교통: 금산읍에서 남이방면 시내버스 운행 (06:00 ~19:50, 30분 간격, 20분 소요), 진안(용담)방면 -> 지방도 795호선 (금산에서 15km)
남이자연휴양림(남이면 건천리)ㄴ
레저와 가족단위 체류형관광의 적합지이며, 활엽수종의 천연림이 울창하여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 그리고 기암절벽과 폭포 등이 어우러져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인근에 조상의 숨결이 살아숨쉬는 백제시대 성터인 문화재로 지정된 ‘백령성지’가 있고 6.25때 치열했던 격전의 상흔을 간직한 육백고지전승탑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지난역사를 다시한번 돌이켜보게 한다. 이로 인해 자연경관과 역사적 현장을 함께 찾을 수 있다. 또한 휴양림을 감싸고 있는 선야봉(729m)에 오르는 등산로를 갖추고 있으며 산정에서는 대둔산의 기암절벽도 한눈에 볼 수 있다.
* 대전서부터미널(20km) - 복수면 소재지(3km)- 진산 - 진산삼거리에서 좌측길로 진입- 2km- 석막리행 이정표 - 이정표 따라 16km가면 목적지 도착
* 고속도로(대전↔통영간) 금산 IC(3㎞) → 금산읍시내 →전주(대둔산 방면 10㎞)→ 남이 석막리(16㎞)→건천리(느티골 2㎞) → 자연휴양림
면내마을
마전리/비례리/서대리/성당리/신평리/요광리/용지리/자부리/장대리/추정리
소개
면적 49.10㎢, 인구 7,728명(2001)이다. 10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은 서대산(西大山)·민재·수암재에 의해 군북면, 남쪽은 금성산ㆍ미력재ㆍ삽재ㆍ성재에 의해 금성면, 서쪽은 만인산·지봉산에 의해 복수면, 북쪽은 작은 사묵·재말재·닭이치·마원령에 의해 충북 옥천군 및 대전과 접한다. 추풍천(秋風川) 주변에 논이 형성되며, 주곡농업 외에 무·참깨·배추·고추·파·호박·가지 등을 재배하고 그 밖에 특용작물인 목화와, 사과·배·감 등의 과수농업이 성하다. 또 석회석도 산출된다. 면의 중서부를 국도가 통과하여 마전리(馬田里)는 대전·전주·금산 등지에 이르는 교통의 요지를 이룬다. 문화재로는 금산 행정(杏亭)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84), 태조대왕태실(충남유형문화재 131), 추정리 성터가 있다.
문화유적
행정 은행나무(천연기념물 84호 · 추부면 요광리)
추부면 요광리 행정마을 입구에 천년 수령을 자랑하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연정자를 이루고 있다. 이 나무의 밑 둘레는 15.5m나 되며 수고가 20.5m로 수령은 1,400여년에 이른다. 또한 그 줄기는 노쇠하여 속이 동굴처럼 비어있다. 이 은행나무는 어느때 심은 것인지 기록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수 없으나 이 마을이 생기기 전부터 자연생으로 나서 자란 것이라 한다.
가볼만한 곳
금화서원(삼승면 선곡리 23-1)
1814년(순조 14)에 계당 최흥림(溪堂 崔興霖)의 후손 최덕진(崔德鎭)이 지방 유림 강재문(姜在文)외 105인의 찬동을 받아 서원 건립을 건의하여 승인을 얻고 이듬해인 1815년에 창건하였다. 최운(崔澐), 성운(成運), 조식(曺植), 성제원(成悌元), 최흥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위패를 봉안하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에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광복 후 지방유림회에서 적극 주선하여 1917년에 복원하였으며 경내의 건물로는 정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사우(祠宇)와 강당, 5칸의 관리사 등이 있다.
태조대왕 태실(충청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31호 · 추부면 마전리 산 1-66)
태조대왕태실은 조선조 제1대왕인 태조 이성계의 태(胎)를 봉안한 석실이다. 태실은 팔각형으로 돌난간을 두른 정역(淨域)을 만들고 그 안에 팔각원당형의 태실구조로 되어 있다. 그 앞에는 구부(龜趺)위에 태실비가 있으며 전면에는 ‘태조대왕태실’이라는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태를 태봉안한 후 만인산을 태봉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가볼만한 곳
서대산(903.7m · 금산군 추부면, 군북면 보광리)
충청남도에서 가장 높은 서대산(903.7m)은 충북 옥천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산의 형태는 땅 속에서 그대로 솟아 오른 것 처럼 보이고 비래산(정맥으로 이어지지 않고 따로 떨어져 독립된 산)에 가깝다. 북쪽으로는 잿말재, 남쪽으로는 비들목재, 남서쪽으로 민재를 지나 산줄기가 이어지지만 그 재들이 낮은 데다가 서대산 자체가 워낙 우람하고 높이 솟아있어 주위의 모든 산들을 압도한다. 산세는 원추형 암산으로 곳곳에 기암 괴봉과 깎아지른 낭떠러지 암반들이 많고 경관이 좋다. 용바위, 마당바위, 선바위, 남근바위, 구름다리, 사자굴, 살바위, 개덕사, 개덕폭포 등이 있고 주릉에는 석문, 견우장연대, 북두칠성 바위에 얽힌 전설이 있으며, 서대산 정상에 서면 민주지산, 덕유산, 대둔산, 계룡산 및 대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금산읍에서 서대산행 시내버스 운행 (07:10-20:10, 1일 7회, 20분 소요)
* 추부면 마전리에서 옥천행 시내버스 운행 성당리 입구 하차 (1시간 간격, 20분 소요)
면내마을
교촌리/두지리/막현리/만악리/묵산리/부암리/삼가리/석막리/엄정리/오항리/읍내리/지방리/행정리
소개
면적 80.44㎢, 인구 4,337명(2001)이 거주하는 진산면은 13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으로 월봉산·월봉재·소라니재·숯고개에 의하여 금성면·복수면, 남쪽으로 열두봉재와 구릉에 의하여 남이면, 서쪽으로 대둔산·배티재[梨峙]로 전북 완주군, 북쪽으로 안평산(安平山)·숯고개로 복수면과 접한다. 유등천의 상류부에 있어 평야가 거의 없다. 주요산물은 보리·호박·누에고치·감 등이며, 석회석광산이 있다. 면의 중부를 국도가 동서로 가로질러 대전·전주와 연결된다. 면의 서부에 있는 대둔산은 한국 8경의 하나로 꼽혀 온 명산으로 경치가 아름답다.
문화유적
권율장군 이치대첩지(충남기념물 제154호·진산면 묵산리 산79-34 외)
금산군과 전북 완주군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대둔산(大芚山) 남쪽 사면의 배티재[梨峙:해발고도 340m]는 대둔산 중허리를 넘는 교통의 요지이다. 산골짜기가 길고 깊어 매우 험한 이 재는 임진왜란때 골짜기에 배나무가 많아 이치(梨峙)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때 2만 왜군이 권율장군에 대패한 지역이 바로 배티재. 임진왜란의 첫 승리를 장식한 이 싸움을 이치대첩 또는 이치싸움이라고 하며 여기에 힘입어 이후 권율은 행주대첩과 웅치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대둔산도립공원의 등산 진입로이기도 하고 신라시대에 원효가 처음 지었다는 사찰 태고사가 가까이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잦다. 배티재의 진산 쪽 언덕에 권율장군이치대첩비(權慄奬軍梨峙大捷碑)가 있다.
태고사 대웅전(충남문화재자료 제27호·진산면 행정리 산29)
충남 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된 태고사 대웅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우리나라 8경의 하나로 금강이라 일컫는 대둔산 마천태 밑에 있는 사찰. 조선시대의 학자 우암 송시열이 수학하였던 곳으로, 절입구의 암벽에 새겨진 '석문(石門)'이라는 글씨도 그가 쓴 것이라 전한다.- 충남 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된 태고사 대웅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우리나라 8경의 하나로 금강이라 일컫는 대둔산 마천태 밑에 있는 사찰. 조선시대의 학자 우암 송시열이 수학하였던 곳으로, 절입구의 암벽에 새겨진 '석문(石門)'이라는 글씨도 그가 쓴 것이라 전한다.
진산향교 명륜당(충남문화재자료 제15호·진산면 교촌리 355)
조선 초기에 창건하였으며, 1684년(숙종10년) 비호산 아래에 중건하였고 1887년과 1904년에 각각 명륜당과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가볼만한 곳
대둔산(해발878m·금산군 진산면, 논산시 벌곡면, 전북 완주군)
1980년 5월에 지정된 도립공원이며 오대산(569m), 월성봉(649m), 비랑산(555m), 태고사계곡의 갓바위, 고깥바위, 선녀폭포등이 신선경을 이루고 있고 봉마다 기암절벽이요, 돌마다 괴석인 대둔산은 노령산맥의 북부에 위치한 곳으로 해발 878m로서 충남 금산, 논산시, 전북완주군 양도 3개군의 군계에 걸쳐있으며 한국8경의 하나로 산림과 수석의 아름다움과 주봉, 천마봉, 거성봉을 비롯한 기암괴석으로 병풍을 이루는 웅장함은 옛날부터 시인 묵객의 절찬을 받은 소금강이다. 산등 대소명산과 더불어 솟아 오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끝없이 펼쳐져 있는 호남평야와 군산과 장항 너머로 서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봄철에 진달래, 철쭉과 연록의 물결, 가을철 불타는 듯 타오르는 단풍, 여름철의 운무속에 홀연히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영봉과 장폭, 겨울철의 온봉 옥령은 형언할 수 없는 자연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특히 낙조대에서 맞이하는 일출과 낙조의 장관은 대둔산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것이며 완주군에서 오르는 구름다리는 80m의 공중가교로서 다리위에는 육각정이라는 약수정이 있고 삼선약수가 있어 산행의 피로를 풀어주며 맑은 날씨에는 서해까지 바라보인다.
* 교통: 대전 서부터미널(12km) - 복수면 신대리 삼거리에서 우측길로 진입(8km) - 진산면 두지리 삼거리에서 우측길로 진입(1km) - 이정표 따라 좌측길로 2 km가면 목적지 도착
진산자연휴양림(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87-13)
깊은 계곡에 산봉우리가 웅장하고 천연활엽수림과 산 중턱이하의 인공조림지는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이다. 인근거리에 대둔산 도립공원과 태고사(전통사찰)가 있고, 임진왜란 당시 군량미 확보를 위하여 호남 진출을 노린 왜적을 맞아 이곳 휴양림내 계곡으로 유인, 화공으로 섬멸한 공적을 기리기 위한 이치대첩지가 있으며 일명 지짐이골이라고 불리고 있다.(98년 개장)
연내마을
대암리/도곡리/두곡리/마수리/상가리/양전리/의총리/파초리/하신리/하유리/화림리
소개
면적 34.77㎢, 인구 5,111명(2001)이 거주하며, 11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금성면은 분지에 위치하므로 비교적 농경지가 넓다. 주요 농산물은 쌀, 특산물로 인삼·과실·누에고치 등이 있다. 면내에 금산위성통신지구국이 있다. 교통은 금산~전주 국도가 중앙부를 지나며, 대전광역시로 통하는 국도가 남북으로 지난다. 문화재로는 칠백의총(七百義塚:사적 105), 금산 충렬사(錦山忠烈祠:충남문화재자료 17), 온양이씨 어필각(溫陽李氏御筆閣:충남문화재자료 22), 고경명선생비(高敬命先生碑:충남문화재자료 28), 두곡리 성지(杜谷里城址), 마수리(馬首里) 성지, 대암리(大岩里) 성지 등이 있다.
문화유적
칠백의총(충북 보은군 회북면 용곡리)
임진왜란(1592년)때 중봉 조헌(趙憲)선생과 승장 영규대사(靈圭大師)가 이끄는 칠백의사가 금산을 점거하고 있던 왜적을 무찌르다 전원이 순절한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있는 성스러운 곳으로서 우리민족의 빛나는 호국사상의 요람지. 1976년 묘역을 성역화하여 문화관광부에서 매년 9월 23일 제향/ 현재 이곳에는 칠백의총, 종용사, 순의비각, 기념관, 순의탑 등이 정화되어 있다/ 배향인물 : 중봉 조헌, 영규대사, 고경명 선생외 칠백의사
* 주요소장 문화재 : 보물제1007호 조천일기, 조헌문과급제교지, 치제문, 조헌의병장제수교서, 조헌종축문묘
금산충렬사(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17호·금성면 상가리)
금성면 상가리에 있는 해주오씨의 사당으로 완월당 오응정과 그의 장자 욱과 그 자 삼송정 직, 손자 방언의 3세에 걸친 4충신의 순국충혼을 모셔 해마다 지방유림에서 추향제를 올리고 있다. 충렬사는 순조 31년 1831년 지방유림과 관헌의 정성으로 건립되었으며 춘추로 제향을 올려 충혼을 위로하고 금곡서원을 부설하여 충의의 인재를 길러냈었으며 이 고장의 교화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사당은 일제의 우리 민족혼 말살정책에 따라 훼철하려고 갖은 책동을 다하였으나 유림과 해주오씨 문중의 결사반대로 보존해오고 있다.
어필각(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22호·금성면 하신리)
금성면 하신리는 원래 온양이씨의 세거지로서 이씨문중에 5세 3효가 있는데 고사인 이태귀와 그의 증손 흥엽, 현손 원배로 효행이 탁월하므로 1924년 당시 유림의 천장으로 마침내 순종황제까지 알게 되어 당대에 장한 일이라 칭찬, 이듬해 3월 온양이씨계효지비(溫陽李氏繼孝之碑)라는 여덟자의 어필을 하사하시게 되자 지방유림과 온양이씨 후손들이 합심하여 어필비를 세우는 한편 비각을 봉건하게 되었다. 또한 3효문에 대한 정각을 세운 바 있는데 의친왕이 溫陽李氏三孝門이라는 친필을 하사하고 1926년 봄 순종황제 승하시에 본손 원배공은 지방유림과 함께 임금님께 은혜의 보답으로 전각을 봉건키로 했다는 뜻을 전해 듣고 숭봉전(崇奉殿)이라는 친필액자를 하사하였다.
면내마을
곡남리/구례리/다복리/목소리/백암리/수영리/신대리/용진리/지량리
소개
면적 56.24㎢, 인구 4,276명(2001)이 거주하는 복수면은 9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으로 대전광역시, 남쪽으로 진산면, 서쪽으로 논산시, 북쪽으로 대전광역시와 접한다. 유등천변에 약간의 농경지가 있어 무·배추·참외·마늘·사과 등 원예작물 생산이 비교적 많으며, 그밖에 무연탄이 산출된다. 면의 남부를 국도가 동서로 가로질러 대전광역시·전주시로 이어지고, 지방도가 유등천변을 따라 남북 방향으로 지난다. 문화재로는 조헌사당(표충사)(趙憲祠堂(表忠祠):충남문화재자료 20), 수심대(水心臺:충남문화재자료 26)가 있다.
문화유적
조헌사당(표충사 ·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20호 · 복수면 곡남리)
조선조 인조 기축년에 건립한 문열공 조헌을 모신 사당이다. 문열공 조헌은 명종 22년인 1567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에 속하였다가 정주교수가 되었으며 선조 5년인 1572년 홍문관 정자로 왕의 불공이 옳지않음을 극간하다가 파직되었고 그 후 다시 부정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와 공조좌랑 전적 전라도 도사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00의병을 모아 금산싸움에서 순절하니 영조 30년인 1754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음력 10월에 자손들이 모여 제사를 올리고 있다.
수심대
수심대는 금산군 복수면 곡남리 시냇물 건너 송촌부락에 위치한 유서깊은 곳이다. 중봉 조헌이 우거하던 곳으로 암석으로 되어 있는 조그마한 산봉우리에 낙낙장송이 우거져 있고 수심대라는 바위에 새겨진 글귀가 있다. 수심대라는 이름은 조헌이 지은 것이며 우암 송시열이 바위에 써서 새긴 것이다. 수심대 아래에는 중봉의 사당 부조묘가 있다. 충청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2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가볼만한 곳
운하산(335m · 복수면 굴례리)
운하산은 금산군 복수면 구례리와 백암리 경계에 있는 것으로 산의 높이는 335m이다. 구름과 뽀얀 안개가 어우러져 절정을 이루는 산이라 하여 운하산이라 하고, 구리가 나는 곳이라 하여 구리산이라고도 부른다.
면내마을
내부리/동편리/두두리/보광리/산안리/상곡리/외부리/조정리/천을리/호티리
소개
면적 57.82㎢, 인구 3,306명(2001)이 거주하는 군북면은 10개 리로 이루어졌다. 동쪽은 매봉·꼬부랑이재에 의해 충청북도 옥천군, 서쪽은 서대산(西臺山:904m)·수암재·먼재·닭이봉·계원봉(鷄圓峰)에 의해 추부면, 남쪽은 국사봉(國師峰:668m)·발군산(發軍山)에 의해 제원면, 북쪽은 서대산·금산고개·지내재에 의해 옥천군에 접한다. 면 전역이 산지이기 때문에 농경지가 적어 쌀·보리 외에 가지·호박·마늘·잎당귀 등이 소량 생산된다. 교통은 금산읍~대전 간 도로와 제원~추부면간 도로가 통과한다. 또한 한국나비보전센터를 마련하기 위해 금산군 군북면 산안리에 부지 25000평을 확보, 머지 않아 곤충전시관 나비생태원을 개관할 예정이다.
문화유적
김학술 효행정려(군북면 천을리)
김학술은 호조참판 김희운의 집에서 태어나 예의도 밝고 효성도 지극하여 어버이가 병석에서 위독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생명을 연장시켰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시묘막을 짓고 시묘하다 호랑도 그를 호위하였다고 한다. 1900년에 고종이 전각을 하사하였다.
현덕사(군북면 외부2리)
1970년에 밀양 박씨 문중에서 건립한 것으로 홍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홍생은 청렴, 금엄하여 관용으로 백성을 다스렸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시묘를 마치고 산 속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효로써 장려를 받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선암(군북면 내부2리)
내부2리 동남쪽 산에 선암(仙岩)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이 곳은 옛날에 선인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다가 하늘로 올라가곤 하였다는 바위로서 직경이 10m가 넘는다.
상곡천(군북면 상곡리)
상곡천은 군북면 신안리 명지목 남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흐르면서 다른 냇물과 합류하여 충북 옥천으로 넘어가는 냇물이다. 군북면 상곡 계곡의 중심을 흐르고 있는 상곡천은 연중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주위의 경관이 뛰어나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용문산성(군북면 외부리)
금산군의 내곽성 중 군북면 내부리 뒷산에 잇는 이 산성은, 성의 둘레가 4.5km나 되는 돌로 된 성으로 백제때 쌓은 산성으로 알려진다. 전란시애 인근 주민의 대피 식량,연료,기타 생활 필수품의 저장 등에 사용되었다. 현재 성터가 남아있다.
금샘과 팽나무거리(금산군 군북면 내부2리)
내부2리 서남쪽에 팽나무가 서 있고, 그 나무 아래에는 맑은 물이 항상 샘솟고 있는데, 이 샘은 바닥에 황금이 깔렸다 하여 금샘이라하고, 팽나무가 있다하여 팽나무거리, 금샘이 있다하여 금샘 거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