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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힐링코스 ‘대청호오백리길’] 신록예찬 : 4월의 어느 날
  •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1-04-22
  • 조회수 : 510


[금강일보 김미진 기자] 우리의 관계와는 별개로 햇빛은 선연하고

호수는 생각보다 아늑했다. 그저 고여만 있는 게 이토록 평화로운 것인지 달아나기 위해 멈춰선 우리는 알지 못했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몇 세기가 지났다고 했다. 수면에 비친 나무는 무명이 될 만큼 자랐고 그저 물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깊어지는 것들

신록이 짙어지면 물가를 둘러싼 사람들, 비로소 숲이 되고.
여지껏 당신을 구축한 것은 모조된 나날

입술과 입술 사이, 얼마나 많은 이름이 낭비됐는지 셀 수도 없어. 당신이 말하고

몇 개의 사랑이 겹쳐야 어른이 되는걸까, 내가 말하면

완성되는 정적

멈춰서야 알 수 있는 것들 길을 잃어야만 보이는 길들

영원은 생각보다 납작했다. 그저 잔물결만이 현재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는데

그게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

침묵은 생각보다 어렵고
믿음은 생각보다 쉽다

나는 책상에서 얼마 전 다녀온 호수에 대해 쓴다. 영영 마르지 않을 것들

영영 잊혀지지 않을 것들

- 어떤 장면, 김미진


나무는 슬픔의 기억력으로 봄을 난다. 겨울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헐벗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버텨낸 세월이 얼마나 길까. 아이러니 하게도 아파도 아프다고 이야기 하지 못한 지난 날의 계절이 있기에 초록을 피워낸다. 이렇게 보면 슬픔도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봄의 신록을 예찬할 수 있게 해주는 필연이다.

따뜻한 빛이 대청호의 푸르른 품 속으로 우리의 등을 밀었다. 먼저 찾은 곳은 4구간, 호반낭만길로 오늘의 첫 봄을 연다. 야트막한 산길로 시작하는 둘레길은 청록이 만연했다. 12.5㎞인 호반낭만길은 천천히 걸었을 때 약 6시간이 소요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기나긴 길 같지만 계속 호수의 풍경이 우리 옆을 지키고, 걷기 편한 데크길로 이뤄져 있어 30분은 뚝딱 사라진다. 물론 6시간 동안 4구간의 모든 길을 걷는 건 어렵겠지만 그래도 주요 포인트는 멀리 있지 않으니 천천히 자연을 만끽하며 걸어보자

봄을 상징하는 벚꽃은 이미 피고 졌지만 서운할 틈 없다. 빛과 공기마저 윤곽진 이 곳은 청명한 장관, 고요는 물결치고 그 위를 떠다니는 윤슬은 무엇을 기다리나. 돗자리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는 연인과 물가를 뛰노는 세 아이들은 이 순간을 무엇으로 기억할까. 그 뒤에선 초록빛 나무들, 수면 위로 쏟아진다. 우리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아, 봄이구나. 깨닫는다.

황홀한 풍경에 붙잡혀 꽤 시간이 지났다. 이번엔 드라마 '슬픈연가'의 촬영지로 걸음을 옮긴다. 광대한 호수를 따라 데크길이 이어지고 막 자란 풀과 젖은 흙 냄새를 맡는다. 전날 비가 온 탓이다. 촉촉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우리는 오래된 사랑처럼 한동안 호수 곁을 떠나지 못했다.

한 10분쯤 걸었을까, 슬픈연가 촬영지에 도착했다. 감독이 어떤 부분을 보고 이 장소를 선택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알게될 거다. 1분 1초, 순간마다 가슴이 요동치는 이유,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에 마음이 더욱 깊어지는 이유를 말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 한적한 들길이 나왔다. 짧은 코스같지만 한 구간에 담긴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 나조차도 그러려고 했지만 '어차피 담지 못할 거, 잠깐의 호강이라도 누리자'라는 생각에 카메라를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골랐다. 어딜 봐도 사방이 장관이다. 물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더니, 더 있다간 헤어나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1구간이다. 4구간보다 길진 않았지만 더 적막하고 데크길 대신 흙길이라 부드럽게 두둥실 떠오르는 듯 걷는 맛이 있었다. 걷다보면 스치는 바람이 풍경(風磬)을 흔든다. 제각각의 소리가 화음을 만들고 그에 응답하듯 연둣빛 잎사귀들의 박수소리가 귓가에 흐른다. 힘찬 멜로디다. 그늘과 햇빛의 연속, 나무의 그림자엔 날개가 한 없이 돋혀있다. 호수 한 가운데서 부슬거리며 날아갈 준비를 하는 푸른 날개들이다. 이렇게 호숫가를 걷다보니 마음이 간질거린다. 잡념이 사라진다. 대청호에서는 공허함이 공허함이 아니었다. 그 곳은 가능성의 자리, 왠지 시원하고 희망으로 부풀려지는 가슴에 나는 뭐든지 가능한 봄, 이라고 4월의 어느 날을 이름짓는다. 이곳에서 나는 러시아의 시인, 아흐마토바의 '곤혹'이란 시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감히 인용해본다.

"그리고 또 다시 내 영혼은 텅 비고 명료해졌다."

커다란 침엽수 사이로 평화로운 호수가 펼쳐져 있었고 나는 더 이상 '명료해졌다'고 말하는 그녀가 부럽지 않았다. 형용할 수 없는 에너지가 나를 채운다. 내가 마주한 자연, 곧 현실을 견디어 내는 동력이 된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초록이 한창이었다. 한 손에는 커피, 도회적인 삶이 있고 시선 끝에는 평화로운 광경이 있다. 이만한 특혜가 또 어디 있을까. 사랑하는 만큼 오래 붙잡아 두고 싶은 순간이었다. 햇빛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물결따라 내게로 밀려온다. 탁 트인 자연, 박하사탕 저리 가라 할 개운함. 오늘도 대청호에 큰 빚을 진다. 한 없이 감사하기만 한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저절로 겸손해져만 갔다.

대청호와 이곳을 찾는 행인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비로소 자연과 하나 된다.

출처 : 금강일보(http://www.ggilbo.com) / 2021.04.21기사 / 김미진 기자 

http://www.gg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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